종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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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는 인류사회발전이 일정한 역사단계에 이르렀을때 나타나는 일종 문화현상으로 사회의식형태 범주에 속하며 이로부터 신앙의 인지와 의식활동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신념과 신앙이다.


중국고대의 종교문화는 주요하게 불교문화와 도교문화였다.중국종교문화원지에서 산서지구는 중국의 불교문화와 도교문화발전의 중요한 기지로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산서는 최초로 불교의 세례를 받은 지구중의 하나이다.일찌기 동한영평년간에 가섭마등과 축법란 이 오대산에 올라 대부령취사를 창건한것이 산서불교문화의 기원으로 된다.서진말년에 북방소수민족정권이 불교를 창도하였다.산서출신인 후 조황제석륵은 부처도를 존봉하며 “대화상”이라 하였으며 산서경내에 불교사옥을 많이 건립했다.그후의 북위 문성제와 효문제가 국력을 모아 대동운강에 불교석굴을 세움으로써 산서각지에 불교사옥건축이 생기게 되였다. 북제시기의 사원건설이 극히 많았는데 지금의 태원서산일대의 사원대다수가 북제시기에 세운것이다. 천룡산석굴은 이시기의 절묘한 조각예술을 반영하였다.  당조시기는  불교사원건설의 전성기로서 산서는 당왕조의 <룡흥지지>와 무측전의 고향으로 조정의 중시를 받았는데 오대산에만 360여개의 사원이 있었고 그 승려가 무려 만여명이나 되였다.돈황막고
석굴현존석각<오대산도>가바로당대오대산불교사원의 성황을 반영한것이다.원조시대는 산서불교문화의 중요한 융합시기였다.원조시대조정은 정교병행제도를 실행했는데 서장전파불교가 산서에 전파되기 시작했다.구비라이는 중통년간에 단바제사에게 명하여 오대산수녕사를 주지하게 함으로써 이로부터 오대산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한지불교와 장전불교문화를 겸유한 성지로 되였다.명청두조대의 역대황제들은 오대산참배활동을 정점에 이르게 하였다.강희,건륭 두황제조대의 활동만 해도11차가 넘었다.수백년래  오대산은 중화 여러민족 대가정의 단결통일을 위호하고 국제문화교류와 세계평화사업에 거대한 작용을 하였다.


산서는 역사상 이름난 고승을 많이 배출해냈다.동진의 산서출신 고승 법현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견인불발, 백절불굴, 용감헌신 정신을 추구하였으며 시종 중화민족이 전진하도록 추동함으로써 로신선생으로부터 <중화의 동량>으로 불리웠고 후세사람들은 그를  <서행구법제일인>이라 불렀다.같은시대의 산서출신 고승 혜원은 아미타불정토법문을 창도하였다. 그후 산서출신 고승 탐란대사는 정토교의를 널리 홍보하면서 정토종을 창설하였다.태원병주대절간 (지금의 몽산),교성현중사,금산란공암에는 정토에 유익한 법문대덕을 수많이 집결시켜 현중사 정토조묘의 지위를 확립했다.산서는 불교의 전파와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했을뿐만아니라 또 불교문물과 예술의 보물고로서 전국적으로 불교유산이 가장 풍부한 지역중의 하나이다. 불교제일성지 오대산, 벽화예술의 보물고  운강석굴, 불가, 도가, 유가 삼교일체의 현공사,현존하는 제일 오랜 목조건축물인 남선사대불전, 북위 역대건축을 집성화한 불광사, 현존하는 제일 높은 목조구조 탑식건축인 응현목탑, “동방비너스”로 불리우는 화암사,명나라 채색예술박물관 평요쌍림사,정토종교의 발원지의 하나인 현중사, 오백신룡이 잠입수련한 밀마사,탑전을 결합시킨 법흥사,법현의 고향 선당불국,월하쌍탑 그림이 어울리는 묘향사…… 광승사<조성금장>,암산사금나라벽화,청나라원조벽화……이모든것들은 산서가 중국불교문화사상에서 차지하는 거족적인 지위를 충분히 설명해주고있는것이다. 


도교는 중국고유의 종교로서 천8백여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도교가 산서에서 언제 흥기하였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기재된 바가 없다. 그러나 동한에 이르러 산서에서 이미 기본적으로 형성되였는데 일부 지방에는 이미 도교묘관을 수건하였다. 북위왕조통치하의 산서는 북천사도의 발원지와 활동중심이였는데 산서의 도교문화는 바로 이때에 제1차 역사적고봉기를 맞이하게 된다. 수조통치자들은 도교에 그닥 흥취를 가지지 않았는바 수양제는 도교를 금지시키고 도교관련서적을 모두 태우기까지 하였다. 당조시대에 와서 산서도교는 역사적으로 두번째 고봉기를 맞게 된다.북송시기에 산서 각 묘관은 향화가 끊이질 않았고 도인들이 부단히 증가하였다.원조시기에 산서는 목전 전국에서 제일 완정하게 보존된 용산석굴군과 세상에서 보기드문 원조벽화를 가진 도교궁전식건축군인 예성영락궁등을 수축하였다. 명조통치자들은 도교를 엄격히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출가인수를 엄격히 제한하였다.명조말기청조초기에 이르러 묘관은 이미 전성의 도시와 향진 각지에 널렸다.청조는 불교를 중시하였으므로 도교각파는 정체상태에 머물게 되였다. 청나라말기에 이미 쇄락해진 도교는 더욱 쇠퇴하여갔다. 도교의 역사적흥망에 따라 산서는 저명한 도사들이 배출되였는데 이를테면 관겸지,려동빈,송덕방등이 있다.


이슬람교는 세계적인 종교의 하나로서 현존하는 청진고사원의 비문기재에 따르면 당조 정원년간에 벌써 이슬람전교사가 “당명진”에 왔었다고 한다.북송년간에는 대식국상인이 산서에 와 상업에 종사하며 살았다.13세기 몽골군대의 많은 무슬린인들이 또 산서에 거주하였다.명나라영락시기에 많은 무슬린들이 대량으로 섬감녕일대로부터 태원에 와 거주하였으며 이로부터 이슬람교는 쾌속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역대  무슬린들의 대거입주는 산서에  점차적으로 전성적으로 대분산과  소집중된 자연 분포를 형성하였다. 산서의 무슬린은 회족이 위주였는데 태원시의 남쪽거리,남해거리와 장치시의 삼도영 등은 모두 유명한 회족사회구역이다. 산서성 에는 모두 106 개의 청진사가 있는데 그중 이름난것들로는 대동시 구루항 청진 대사원, 태원시 청진고사원,장치시청진북사원과 청진남사원 등으로 모두 원명시기에 건립된것들이다. 산서성의 오래된 청진사들로는 태원시 청화원,런이리교자포와 대동이란재,그리고 장치시 이향재와 진성시 월성루,방심재등이 있다.


기독교는 비교적 일찌기 중국에 전파되였으나 영향력를 준 시기는 명나라말 청나라초기이다. 당시 먼저 산서에 와 전교한것은 이태리인들이였다. 청조시기 기독교전파는 엄격히 제한되여 있었는데 <황포조약>의 체결로 기독교금지조치가 완화되여 교인들이 많이 늘어났다.의화단 운동중에  기독교는 심중한 타격을 받았다. 해방후 중국의 기독교는 독립자주의 길로 나아갔으나 여러가지로 굴곡을 겪어왔다. 개혁개방이후 종교신앙자유의 정책으로 산서의 도시와 향진의 교인인수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는데 그중 특히 주목할것은 농촌종교문화의 흥기로 서양의 기독교,천주교 활동이 매우 빈번해진 것이다.바티칸교황이 비준한 반사산성모당과 짙은 고로마예술풍격을 띈 천주교태원교구주교좌당은 산서가 가지고있는 독특한 기독교문화풍격이다.


종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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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인류사회발전이 일정한 역사단계에 이르렀을때 나타나는 일종 문화현상으로 사회의식형태 범주에 속하며 이로부터 신앙의 인지와 의식활동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신념과 신앙이다.


중국고대의 종교문화는 주요하게 불교문화와 도교문화였다.중국종교문화원지에서 산서지구는 중국의 불교문화와 도교문화발전의 중요한 기지로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산서는 최초로 불교의 세례를 받은 지구중의 하나이다.일찌기 동한영평년간에 가섭마등과 축법란 이 오대산에 올라 대부령취사를 창건한것이 산서불교문화의 기원으로 된다.서진말년에 북방소수민족정권이 불교를 창도하였다.산서출신인 후 조황제석륵은 부처도를 존봉하며 “대화상”이라 하였으며 산서경내에 불교사옥을 많이 건립했다.그후의 북위 문성제와 효문제가 국력을 모아 대동운강에 불교석굴을 세움으로써 산서각지에 불교사옥건축이 생기게 되였다. 북제시기의 사원건설이 극히 많았는데 지금의 태원서산일대의 사원대다수가 북제시기에 세운것이다. 천룡산석굴은 이시기의 절묘한 조각예술을 반영하였다.  당조시기는  불교사원건설의 전성기로서 산서는 당왕조의 <룡흥지지>와 무측전의 고향으로 조정의 중시를 받았는데 오대산에만 360여개의 사원이 있었고 그 승려가 무려 만여명이나 되였다.돈황막고
석굴현존석각<오대산도>가바로당대오대산불교사원의 성황을 반영한것이다.원조시대는 산서불교문화의 중요한 융합시기였다.원조시대조정은 정교병행제도를 실행했는데 서장전파불교가 산서에 전파되기 시작했다.구비라이는 중통년간에 단바제사에게 명하여 오대산수녕사를 주지하게 함으로써 이로부터 오대산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한지불교와 장전불교문화를 겸유한 성지로 되였다.명청두조대의 역대황제들은 오대산참배활동을 정점에 이르게 하였다.강희,건륭 두황제조대의 활동만 해도11차가 넘었다.수백년래  오대산은 중화 여러민족 대가정의 단결통일을 위호하고 국제문화교류와 세계평화사업에 거대한 작용을 하였다.


산서는 역사상 이름난 고승을 많이 배출해냈다.동진의 산서출신 고승 법현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견인불발, 백절불굴, 용감헌신 정신을 추구하였으며 시종 중화민족이 전진하도록 추동함으로써 로신선생으로부터 <중화의 동량>으로 불리웠고 후세사람들은 그를  <서행구법제일인>이라 불렀다.같은시대의 산서출신 고승 혜원은 아미타불정토법문을 창도하였다. 그후 산서출신 고승 탐란대사는 정토교의를 널리 홍보하면서 정토종을 창설하였다.태원병주대절간 (지금의 몽산),교성현중사,금산란공암에는 정토에 유익한 법문대덕을 수많이 집결시켜 현중사 정토조묘의 지위를 확립했다.산서는 불교의 전파와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했을뿐만아니라 또 불교문물과 예술의 보물고로서 전국적으로 불교유산이 가장 풍부한 지역중의 하나이다. 불교제일성지 오대산, 벽화예술의 보물고  운강석굴, 불가, 도가, 유가 삼교일체의 현공사,현존하는 제일 오랜 목조건축물인 남선사대불전, 북위 역대건축을 집성화한 불광사, 현존하는 제일 높은 목조구조 탑식건축인 응현목탑, “동방비너스”로 불리우는 화암사,명나라 채색예술박물관 평요쌍림사,정토종교의 발원지의 하나인 현중사, 오백신룡이 잠입수련한 밀마사,탑전을 결합시킨 법흥사,법현의 고향 선당불국,월하쌍탑 그림이 어울리는 묘향사…… 광승사<조성금장>,암산사금나라벽화,청나라원조벽화……이모든것들은 산서가 중국불교문화사상에서 차지하는 거족적인 지위를 충분히 설명해주고있는것이다. 


도교는 중국고유의 종교로서 천8백여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도교가 산서에서 언제 흥기하였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기재된 바가 없다. 그러나 동한에 이르러 산서에서 이미 기본적으로 형성되였는데 일부 지방에는 이미 도교묘관을 수건하였다. 북위왕조통치하의 산서는 북천사도의 발원지와 활동중심이였는데 산서의 도교문화는 바로 이때에 제1차 역사적고봉기를 맞이하게 된다. 수조통치자들은 도교에 그닥 흥취를 가지지 않았는바 수양제는 도교를 금지시키고 도교관련서적을 모두 태우기까지 하였다. 당조시대에 와서 산서도교는 역사적으로 두번째 고봉기를 맞게 된다.북송시기에 산서 각 묘관은 향화가 끊이질 않았고 도인들이 부단히 증가하였다.원조시기에 산서는 목전 전국에서 제일 완정하게 보존된 용산석굴군과 세상에서 보기드문 원조벽화를 가진 도교궁전식건축군인 예성영락궁등을 수축하였다. 명조통치자들은 도교를 엄격히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출가인수를 엄격히 제한하였다.명조말기청조초기에 이르러 묘관은 이미 전성의 도시와 향진 각지에 널렸다.청조는 불교를 중시하였으므로 도교각파는 정체상태에 머물게 되였다. 청나라말기에 이미 쇄락해진 도교는 더욱 쇠퇴하여갔다. 도교의 역사적흥망에 따라 산서는 저명한 도사들이 배출되였는데 이를테면 관겸지,려동빈,송덕방등이 있다.


이슬람교는 세계적인 종교의 하나로서 현존하는 청진고사원의 비문기재에 따르면 당조 정원년간에 벌써 이슬람전교사가 “당명진”에 왔었다고 한다.북송년간에는 대식국상인이 산서에 와 상업에 종사하며 살았다.13세기 몽골군대의 많은 무슬린인들이 또 산서에 거주하였다.명나라영락시기에 많은 무슬린들이 대량으로 섬감녕일대로부터 태원에 와 거주하였으며 이로부터 이슬람교는 쾌속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역대  무슬린들의 대거입주는 산서에  점차적으로 전성적으로 대분산과  소집중된 자연 분포를 형성하였다. 산서의 무슬린은 회족이 위주였는데 태원시의 남쪽거리,남해거리와 장치시의 삼도영 등은 모두 유명한 회족사회구역이다. 산서성 에는 모두 106 개의 청진사가 있는데 그중 이름난것들로는 대동시 구루항 청진 대사원, 태원시 청진고사원,장치시청진북사원과 청진남사원 등으로 모두 원명시기에 건립된것들이다. 산서성의 오래된 청진사들로는 태원시 청화원,런이리교자포와 대동이란재,그리고 장치시 이향재와 진성시 월성루,방심재등이 있다.


기독교는 비교적 일찌기 중국에 전파되였으나 영향력를 준 시기는 명나라말 청나라초기이다. 당시 먼저 산서에 와 전교한것은 이태리인들이였다. 청조시기 기독교전파는 엄격히 제한되여 있었는데 <황포조약>의 체결로 기독교금지조치가 완화되여 교인들이 많이 늘어났다.의화단 운동중에  기독교는 심중한 타격을 받았다. 해방후 중국의 기독교는 독립자주의 길로 나아갔으나 여러가지로 굴곡을 겪어왔다. 개혁개방이후 종교신앙자유의 정책으로 산서의 도시와 향진의 교인인수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는데 그중 특히 주목할것은 농촌종교문화의 흥기로 서양의 기독교,천주교 활동이 매우 빈번해진 것이다.바티칸교황이 비준한 반사산성모당과 짙은 고로마예술풍격을 띈 천주교태원교구주교좌당은 산서가 가지고있는 독특한 기독교문화풍격이다.